시장주의 패러다임, 계획주의 패러다임, 죠지스트 패러다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의견충돌 유발요인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부동산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어 있는가 아닌가, 투기용 토지수요가 어느 정도 되는가, 자본이득이 어느 정도 발생하는가, 등 현실을 파악함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큰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이 과연 합리적인 존재라고 보느냐 아니냐 2) 가치관의 차이 예를 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론에 잘 들어맞는 현상은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현상은 무시하거나 또는 예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중시하느냐 공동체적 가치관을 중시하느냐 그리고 효율을 중시하느냐 형평을 중시하느냐 3)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의 차이 부동산 문제에 대한 처방을 놓고, 조세를 통한 개발이익의 환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과 개발이익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온갖 개발사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침을 튀기며 입씨름할 수도 있다. 방법론적 논리의 차원에서는 시장의 논리를 지지하느냐 공권력에 입각한 계획의 논리를 지지하느냐
2. 시장주의 패러다임 가치관: 효율 그리고 개인의 자유 간단히 말해서 시장주의란 시장을 이상적 사회모형으로 보고 시장원리를 사회구성 및 운영의 주된 원리로 삼고자하는 사상이다. 물론, 시장주의가 말하는 시장은 자본주의 시장이다. 대체로 보아 시장주의는 경제성장 내지는 물질적 풍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분배에 앞서 효율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파이를 크게 키우는 것이 급선무이며, 분배는 파이의 생산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장주의가 이와 같이 시장을 이상적인 사회모형으로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시장이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인류에게 최대한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는 탁월한 제도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장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으뜸으로 꼽는다. 시장주의가 시장을 높이 평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장이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자유의 신장에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자본주의 시장에 나가보면 별별 것이 다 있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확실히 사람들은 풍부한 선택의 자유를 만끽한다. 예컨대 같은 구두라도 온갖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소비자들의 다양한 구미를 최대한 충족시켜 준다. 빨간 구두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빨간 구두를, 하얀 구두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하얀 구두를, 까만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구두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그런 구두를 시장은 공급해준다. 대다수가 검정 색 구두를 신는다고 해서 노란색 구두를 원하는 소수에게 결코 검정 색 구두를 강요하지 않는다. 시장에 다수의 판매자가 경쟁하는 덕분에 각 소비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가게에 억지로 드나들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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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주의가 효율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형평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 공평한지에 대하여 시장주의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시장주의자는 시장이 매우 공평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우선, 시장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라면을 살 때 경상도 사람이라고 비싼 가격을 부르고 전라도 사람이라고 싼 가격을 부르지 않는다. 시장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 기본적으로 시장은 평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돈 많이 버는 직장은 그 만큼 사람을 바쁘고 고달프게 만들며, 보수가 적은 직장은 그 만큼 사람을 덜 고달프게 만들거나 여가를 많이 낼 수 있게 만든다. 대체로 보아 시장주의자는 만장일치로 합의된 것 이외에는 공익의 개념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주의는 공익의 이름아래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행위나 정책에 매우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설령 공익이 존재한다고 해도 굳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시장주의는 정부의 팽창을 극히 경계하며, “정부의 실패”를 강조한다. 비록 시장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것이 자동적으로 정부개입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시장주의자는 주장한다. 정부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해악이 시장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손실보다 더 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 개인의 합리성 시장주의자는 사회구성원들 각 개인이 잘 알아서 행동하면 그 결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시장주의의 밑바탕에는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다. 대체로 보아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시장주의자는 굳게 믿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주어진 목표(즉, 개인의 이익)를 가장 잘 달성하는 수단을 안다는 뜻이다. 즉, 도구적 합리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장주의자의 주장은 개인의 합리성을 전제하는데, 이런 전제는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시장은 경제학의 주된 연구대상이다. 경제학은 시장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형성한다. 시장주의는 개인의 합리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율적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장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 자유방임을 주창한다. 시장주의는 각 개인이 자유스럽게 사익을 추구하게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전체의 이익도 증진된다고 굳게 믿는다. 시장주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이를 사회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다. 시장주의는 이와 같이 개인의 합리성을 굳게 믿기 때문에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격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동산가격을 비롯한 모든 상품의 가격은 구매자와 판매자들이 합리적 판단 아래 자유스럽게 거래한 결과로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표이다. 달리 말하면 가격은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놓고 비싸니 아니니 하고 시비를 거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자유에 대한 도전이라고 시장주의자는 비난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시장에서 가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때 해당 상품으로부터 국민이 누리는 순이익(=국민이 누리는 총편익에서 국민이 치르는 희생을 뺀 값)이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물론 현실의 시장에서는 가격이 왜곡됨으로써 해당 상품으로부터 국민이 누리는 순이익이 극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격을 왜곡하는 중요한 요인은 각종 독점적 요소들이다. 독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국민의 이익이 아닌,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서 가격이 조작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시장주의는 그 독점적 요소가 주로 정부의 과도한 혹은 쓸데없는 시장개입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래서 시장주의는 특히 정부와 결탁한 독점적 영향력을 극력 배격하면서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작은 정부’ 혹은 ‘최소 정부’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방법상의 논리: 시장의 논리 어느 사회나 산적한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시장을 이상적 모형으로 삼기 때문에 시장주의는 시장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흔히 말하는 시장원리의 핵심적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 첫째는 거래를 통한 상호이익 증진의 원리이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거래하게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시장이란 바로 이런 이치를 바탕으로 한 제도이다. 시장에서 거래를 했다는 것은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있었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시장에 나가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의 이익이 증진된다. 100만 명이 시장에서 거래를 했으면 100만 명 모두의 이익이 증진된다. 시장이란 자유스런 거래를 통해서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장소 혹은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치가 최대한 활용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시장주의자의 핵심 주장이다. 시장원리의 두 번째 핵심은 경쟁의 원리다. 시장주의가 말하는 시장은 자유경쟁시장이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잘 아는 생활의 지혜인데, 시장에서는 자유경쟁 덕분에 좋은 상품이 생산되고 서비스의 질도 높아지며, 자유경쟁 덕분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게 된다. 시장은 바로 그런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 제도라고 시장주의자는 생각한다. 불로소득이니 특혜니 부당이득이니 하는 것들이 대부분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생기는 병폐들이다. 경쟁이 제대로 되어야만 시장에서 가격이 가격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들이 적재적소에서 잘 이용될 수 있다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물론, 현실의 시장에서는 독점적 요소들이 자유경쟁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의 쓸데없는 간섭과 개입이 그 주된 원인이라고 시장주의자는 주장한다. 시장원리의 세 번째 핵심은 경제적 인센티브의 원리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상벌체계가 잘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즉,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응분의 상을 주고 반대로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징벌을 내리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풍조가 확립되어 있어야만 사회가 제대로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도 결국 상벌체계의 일종이다. 시장에서는 고객의 욕구를 잘 만족시키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돈을 많이 벌게 되며,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산한다. 돈을 번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회가 시장을 통해서 상을 준다는 뜻이다. 도산한다는 것은 사회가 시장을 통해서 벌을 내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과 벌 때문에 기업은 값싸고 질 좋고 고객의 마음에 쏙 드는 상품을 생산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노동자들도 열심히 일하면 돈으로 보상을 받고 게으름 피우면 실업의 벌을 받는다. 시장은 이와 같이 돈으로 상과 벌을 준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상과 벌이 곧 모든 경제활동을 조절하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된다. 시장주의는 시장이 탁월한 정보노출․수집․처리 장치임을 강조한다. 시장에서는 단순히 많은 정보가 수집되고 전달될 뿐만 아니라 유용한 정보가 자동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누가 라면을 좋아하고 누가 백구두를 좋아하며 누가 음란비디오를 좋아하고 누가 영계를 좋아하는지 시장에 가보면 환하게 다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선호를 스스로 노출하며, 이 정보는 필요로 하는 사람들, 예컨대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에게 즉각 전달되고 효과적으로 처리된다.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다른 문제도 아닌,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장처럼 사회문제를 효과적으로 잘 해결해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제도적 장치는 이 세상에 없다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그래서 설령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부가 주도하여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시장주의는 시장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환경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경제적 인센티브의 원리를 최대한 활용해서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파괴의 정도에 비례해서 엄격하게 금전적 불이익을 주고, 반대로 환경을 개선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선의 정도에 비례해서 금전적 이익을 주는 정책을 펴라고 주문한다. 시장주의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요소는 사유재산권이라고 본다. 사유재산권이 완전히 확립되면 제도나 법률 등 시장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나머지 것들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고 본다.
토지에 관한 시장주의 주장 토지 및 부동산에 관한 시장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하게 개인의 시각에서 토지문제나 부동산문제를 본다는 것이다. 각 개인의 시각에서 토지를 보면, 부동산전문가들이 흔히 강조하는 토지의 특성들이 대부분 부정된다. 예를 들면, 토지의 특성으로 부동산전문가들은 공급의 고정성 혹은 부증성을 첫 번째로 꼽는다. 우리나라의 국토면적은 99,500 km2로 고정되어 있고, 제주도의 면적은 1,845 km2로 고정되어 있다는 식이다. 우리 국민 전체의 입장이나 제주도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공급이 고정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돈이 없어서 그렇지 땅이 없어서 못사는 일은 없다. 돈만 있으면 각 개인은 토지를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토지이용규제만 풀리면 농지가 대량 상업용이나 공업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 2004년 우리나라 국토의 65.1%가 산림지요 21.4% 정도가 농경지인 반면 공장용지는 0.6%에 불과하였다. 만일 농지가 자유롭게 전용될 수만 있다면 공장을 짓고 싶어 하는 개인은 돈만 마련하면 공장용지를 거의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다. 시장주의는 토지공급의 고정성(혹은 부증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토지나 부동산이 그런 특성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각 개인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땅을 살 수 있도록 공급이 신축성 있게 변할 수 있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보다 땅을 더 잘 이용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땅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래야 국토가 효율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토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가장 의미 있는 토지의 특성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이런 특성에 의거해서 모든 인간은 그런 대자연의 은총을 똑 같이 누릴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시장주의는 이런 식의 주장을 아주 듣기 싫어한다. 물론, 우리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 대한민국의 땅덩어리는 우리가 땀 흘려 만든 것도 아니고 수출해서 번 것도 아니다. 분명히 대한민국 사람 그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 금수강산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데에 털끝만치도 기여한 바가 없다. 그러나 시장주의는 국토가 대자연의 무상공여물인지 아닌지, 국토가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는 대수롭지 않게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한정된 국토를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것인가이다. 그렇다면 사회전체의 입장은 별 의미가 없다. 오직 개인의 입장만이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토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어차피 각 개인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 특히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토지가 공짜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토지소유자들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토지가 공짜가 아닌데 각 개인으로 하여금 공짜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옳은 일도 아니라고 시장주의는 말한다. 왜냐 하면, 공짜는 낭비하고 남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든 토지소유자들이 자기 땅을 공짜로 생각하고 남용한다면 결국 대한민국 국토 전체가 효율적으로 이용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지는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해주기 위해서 시장주의자는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의 보장을 무척 강조한다. 토지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확고하게 보장해주어야만 토지를 보다 더 잘 이용하려는 동기가 형성되며, 모든 토지소유자들이 이런 인센티브를 가질 때 대한민국의 토지가 보다 더 효율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시장주의는 주장한다. 개인의 합리성 그리고 시장원리에 대한 시장주의의 굳은 신봉은 부동산가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나라 부동산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불평하는데, 이는 비싸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소치라고 시장주의자는 힐난한다. 부동산가격이 비싼 이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합리적 판단 아래 우리나라 부동산구매자들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나라 부동산이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면 어떻게 시장에서 그렇게 높은 가격이 형성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나라의 지가가 높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나라 토지의 가치가 높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가를 무리하게 억제하기보다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순응할 것을 시장주의자는 강력하게 주문한다. 모두들 투기 때문에 우리나라 부동산가격이 비싸다고 하는데, 투기가 뭐가 그렇게 나쁘냐고 시장주의자는 반문한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시장주의자는 투기를 좋게 본다. 기본적으로 투기가 가격을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산물을 예로 들어보자. 가을 추수 때 쌀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쌀값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쌀값은 폭락한다. 그런데 투기꾼들이 시세차익을 노리고 쌀을 대량 매입하기 시작하면 쌀값 하락세가 멈추게 된다. 결과적으로 폭락이 예방된다. 이듬해 늦봄에 시장에서 쌀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하면 쌀값은 올라간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쌀값은 폭등한다. 그러나 쌀값이 적당히 올라갔을 때 투기꾼들이 미리 사재기해 두었던 쌀을 시장에 솔솔 풀기 시작하면 쌀값 상승세가 꺾인다. 결과적으로 폭등이 예방된다. 투기의 이런 가격안정화 기능은 경제학원론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나오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토지의 특수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시장주의는 토지투기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장주의는 지가앙등이나 토지투기를 심각한 문제라고 보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지가억제 및 토지투기 근절이 토지정책의 주된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흔히 투기가 부동산가격을 높여서 거품이 끼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장주의자는 투기가 반드시 거품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동산가격 상승이 부동산투기를 조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동산투기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시장근본가치 이상으로 터무니없이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동산투기 열풍이 부동산가격을 올리는 예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본다. 그래서 언뜻 보면 투기 때문에 부동산가격이 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시장주의자들은 주장한다. 설령 부동산투기가 있고 그래서 부동산가격이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차피 올라갈 부동산가격을 미리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한적한 농촌지역의 땅값이 현재 평당 20만원인데, 이 지역에 10년 후 지하철이 통과하고 지하철역이 들어서게 된다고 하자. 지하철역이 들어서면 인근지역은 크게 개발되고 땅값도 크게 오른다. 지하철역 주변이 개발되는 10년 후의 땅값이 평당 200만원이라고 하자. 이 200만원은 개발된 토지의 유용성이나 실용가치를 반영한 값이다. 그러면, 현재 평당 20만원 하던 이 지역의 땅값이 지하철역이 들어서는 10년 후에 갑자기 평당 200만원으로 뛰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농촌의 땅값은 지하철이 건설된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지금부터 오르기 시작한다. 금리가 5%라고 하면, 지금 당장 땅값이 20만원에서 130만원으로 뛰고 나서, 앞으로 10년간 서서히 200만원에 접근한다. 조용하던 농촌의 땅값이 느닷없이 20만원에서 130만원으로 뛰었으니 투기 탓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투기가 없었더라도 어차피 이 농촌의 땅값은 평당 200만원 수준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투기는 단지 이것을 앞당겼을 뿐이다. 20만원과 130만원의 차이인 110만원은 언젠가는 허망하게 꺼져버릴 거품이 아니라 10년 후에 실제로 존재하게 될 개발가치를 반영하는 실체다. 사람들이 부동산을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부동산의 생산성이나 유용성 때문이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토지나 건축물은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런 것에 대해서는 투기수요도 없다. 부동산투기도 결국은 부동산의 생산성 내지는 유용성 때문에 존재한다. 성공한 부동산투기는 거의 예외 없이 목 좋거나 장래성이 큰 부동산에 집중된다. 예컨대 미래에 개발가능성이 높은 토지에는 거의 예외 없이 투기꾼들이 몰려든다. 이런 사실들은 부동산투기의 원천이 부동산의 생산성 내지는 유용성임을 반증한다는 점을 시장주의자는 부각시킨다. 부동산투기로 인한 부동산가격 앙등이 정 걱정이 되면, 부동산의 공급을 늘리면 그만이라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인구에 비해 땅덩어리가 좁아서 땅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 면도 있지만, 정부의 각종 토지이용규제도 지가앙등에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시장주의자는 진단한다. 각종 규제가 토지공급의 발목을 묶고 있으니 땅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정부의 각종 규제들은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시장주의자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쓸데없는’ 규제들이 우리나라 부동산가격을 ‘쓸데없이’ 비싸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주의자는 토지이용의 효율을 위해서나 지가안정화를 위해서나 정부의 쓸데없는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푸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우려하고 있지만, 시장주의에 의하면 정부의 각종 쓸데없는 규제가 바로 그런 불로소득의 근본원인이다. 예를 들면, 도시용 토지의 가격은 농지 가격의 10배, 20배가 될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데, 이런 큰 차이는 농지의 자유로운 전용을 가로막는 정부의 토지관련 규제 탓이다. 그런 규제 덕분에 도시용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큰 특혜를 누리게 된다. 이런 특혜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불로소득이라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사실, 시장주의자는 특혜라는 말은 잘 써도 불로소득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불로소득의 개념이 매우 애매모호해서 자세히 뜯어보면 불로소득인지 아닌지 똑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서, 일생 죽어라고 일했던 회사를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을 놓고 고민하는 은퇴자를 생각해보자. 은행에 넣어두면, 매달 200만원씩 이자소득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돈으로 부동산을 샀더니 운 좋게 땅값이 많이 올라서 매달 300만원에 상당하는 자본이득을 올렸다고 하자. 이 300만원을 몽땅 불로소득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은행 이자를 제외한 100만원만 불로소득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설령 불로소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부동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주가가 많이 오르면 주식투자한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번다. 외환시세가 올라도 외환을 가진 사람은 돈을 번다. 배추 값이 크게 오르면 배추농사꾼이나 중간상은 큰 재미를 본다. 이 모두가 불로소득인가? 그렇다면 왜 지가상승으로 인한 자본이득만 가지고 야단인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이자율이 많이 떨어졌다. 뒤에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자율이 떨어지면 부동산가격이 올라간다. 그렇다면 정부의 금리인하 조치는 불로소득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가격상승으로 인한 소득을 불로소득이라고 보고 이것을 국가가 환수한다면, 주가, 외환시세, 배추가격 등이 떨어졌을 때 개인이 당하는 손실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을 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런 등등의 질문을 던지는 시장주의자는 불로소득의 사회적 환수에 대해서 대체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시장주의는 지역간 불균형이나 수도권비대화가 심각한 토지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규모의 경제라든가 집적의 이익 때문에 지역불균형이나 수도권비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시장주의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뜬다. 지역불균형이나 수도권비대화는 각 개인이나 기업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누가 강제해서 개인이나 기업이 특정 지역에 몰린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시장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장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결정을 최대한 존중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 국가균형발전의 명분아래 개인과 기업을 강제로 지방에 분산시키는 정책은 개인의 신성한 자유를 침해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조치라고 시장주의자들은 입을 모은다. 시장주의는 대체로 토지의 특수성 부인한다. 많은 사람들이 땅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반해서 시장주의자는 토지를 특별 취급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노동이나 석탄과 같이 토지도 우리가 효율적으로 잘 이용해야할 하나의 자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이용을 최대한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시장주의자의 지론이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우리나라 3,000여백만 필지 각각이 모두 최선의 용도에 이용될 때 비로소 우리 국토가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각 필지가 최선의 용도에 이용되기 위해서는 그 땅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용권을 주면된다. 그러면 각 필지의 땅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면 된다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토지에 대한 시장이 형성되면, 각 필지별로 최고의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고 이용권이 자연히 이런 사람들에게 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시장주의자의 결론이다.
3. 계획주의 패러다임 가치관: 공익정신 계획주의는 사회의 운영이나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공적 계획, 특히 정부의 계획적 개입의 필요성 및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공익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익의 희생이 필요하고, 사유재산권에 대한 공적 제한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사유재산권이 가장 잘 보장된다는 미국에서도 정부의 토지이용규제로 인한 개인의 손실을 보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회계약이론에 의하면 국민들이 합의한 것은 중요한 공익적 가치를 가진다. 예를 들면, 우리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세대도 현 세대 못지않게 잘 살아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형평은 사회적 기본가치다. 시장주의자는 시장이 매우 공평한 제도라고 우기지만, 계획주의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시장은 돈 없는 사람은 철저하게 배제한다. 돈 없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사람대우도 받지 못한다.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절실한 욕구는 묵살하면서, 부자들의 하찮은 욕구는 지극정성을 떠받든다. 더욱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형평의 차원에서 정부가 계획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계획을 통해서 빈부격차의 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계획주의자는 주장한다. 바로 이런 형평성의 제고가 정부개입의 중요한 이유가 된다. 토지문제도 그 예외는 아니다. 형평 이외에도 자유, 정의, 국가의 위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기본가치들이 있을 수 있다. 계획주의는 가치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다. 계획주의는 공익의 명분아래 상충된 여러 가치들 사이의 조화를 지향하며, 특히 효율과 형평의 조화를 무척 강조한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격을 정부가 통제하는 경우가 무척 많은 것이 사실인데, 이 때 정부가 흔히 내거는 명분은 공익이다. 설령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격은 공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구나 시장에서는 사익만을 생각한다. 국민경제를 염려해서 혹은 실업문제를 염려해서 일부러 시장을 찾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시장에서는 모두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도 사익을 주로 반영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공익이 도외시될 가능성이 높다. 서 삼겹살의 가격을 적정수준으로 인상함으로서 공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현실에 대한 인식: 개인과 집단의 비합리성 우선, 시장주의와는 반대로 계획주의는 개인의 합리성에 대하여 상당히 유보적이다. 계획주의자는 개인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고 본다.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의 전문가들은 인간이 그리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실증적 증거들을 수없이 많이 제시하고 있다. 보통 시민들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그리 합리적이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객관적 증거를 가지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개인은 합리적이라고 믿는 시장주의의 현실인식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계획주의의 현실인식이 평행선을 긋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계획주의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보지 않는다. 만일 비합리적 선호나 비합리적 신념 탓으로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나서서 개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계획주의자는 말한다. 예를 들면, 좋은 교육이 자신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외의 큰 이익을 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교육받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럴 때 정부가 나서서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피교육자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 사실 계획주의가 더 크게 문제 삼는 것은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집단의 합리성이다. 아무리 개인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도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예를 들어서, 매년 홍수피해를 입는 어떤 마을에서 홍수대책으로 제방을 쌓기로 했다고 하자. 이 경우, ①마을 사람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제방 쌓기에 다함께 열심히 일하면 모두에게 이익이지만, ②특정인은 놀고 나머지 사람들만 열심히 일한다면 그 특정인은 무임승차의 이익을 얻어서 최고로 좋고, ③반대로 특정인만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놀기만 한다면 그 특정인은 큰 손해를 보며, ④그렇다고 모두들 남이 해주기만을 바라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모두 손해만 보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 제각기 무임승차 이익만 생각하고 아무도 제방 쌓기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결국 제방 쌓기에 실패하여 모두가 망하는 꼴을 당하게 된다. 집단이 합리적 선택에 실패한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이 제방 쌓기의 상황을 표현하면, ①의 경우는 모두가 협조적인 상황이고, ②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협조적인 반면, 특정인은 비협조적이어서 무임승차의 이익을 누리는 상황이며, ③의 경우는 특정인은 협조적인 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비협조적인 상황, 그리고 ④의 경우는 모두가 비협조적인 상황이다. 이 제방 쌓기의 예에서 보듯이 집단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만 챙긴 결과 집단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좌절되는 현상을 흔히 죄수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집단구성원의 협동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구성원들의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집단이 원하는 바가 잘 달성되지 못하는 문제를 집단행동의 문제라고 하는데, 죄수의 딜레마는 집단행동 문제의 전형이다. 계획주의자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 우리 주위에서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가정을 보자. 두 부부가 서로 협조적이면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두 부부 중에서 한 사람은 가정에 헌신적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이 개판을 치면, 한 사람은 고생 직사도록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편안히 즐기기만 한다. 협조적인 사람은 비협조적인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는 꼴이다. 만일 두 사람 모두 비협조적이면 가정은 파탄 나고 모두에게 최악의 상황이 초래된다. 죄수의 딜레마 상황은 이렇게 가정에서도 전개된다. 다만, 이런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 각자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가정이 유지될 수도 있고 가정이 파탄날 수도 있다. 각자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경제학이나 시장주의가 전제하듯이 그 사람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고 하자. 합리적인 사람은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우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이에 따라 최선의 행동을 선택할 것이다. 소위 내쉬(Nash)전략을 택한다는 것이다. 우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준다고(협조적이라고) 하자. 만일 나도 함께 열심히 일하면(협조적이면) 나에게도 이익이 오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으니 최고로 좋다. 따라서 협조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 모두 논다고(비협조적이라고) 가정하자. 이때 나만 일한다면(협조적이라면), 이익에 비해서 고생이 너무 심하니 망한 꼴이요, 나도 같이 논다면(비협조적이면), 나도 손해를 보지만 크게 망하는 꼴은 당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도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과적으로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비협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나만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모두 합리적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비협조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렇게 모두가 비협조적으로 행동한 결과는 모두가 협조한 결과에 비해서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아닌,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 문제다. 서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경제학적으로 말하면, 반복게임에서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도 협조가 잘 이루어진다고 흔히 경제학자나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이런 점에서도 시장주의의 현실인식과 계획주의의 현실인식이 다르다. 계획주의에 의하면, 시장주의자의 주장은 사람의 수가 적고 모든 사람이 늘 먼 미래까지 잘 내다보고 행동하는,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통하는 얘기일 뿐이다. 관련된 사람의 수가 많고 이들이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는 보통의 상황에서는 죄수의 딜레마가 빈번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튼튼한 국방, 빈틈없는 치안, 쾌적한 생활환경, 정확한 일기예보, 도로, 제방, 신호등 등 소위 공공재나 준공공재의 공급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공공재나 준공공재는 우리가 일상 살아가는데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을 잘 확보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협동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 문제 때문에 개인들의 자율적 결정과 행동에 맡겨서는 이런 것들이 잘 확보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많은 공공재와 준공공재가 시장에서는 잘 공급되지 않는다. 즉, “시장이 실패”한다. 이런 것들이 잘 공급되면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해주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슬쩍 빠지려고만 한다. 시장주의와는 달리 계획주의는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격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만일 개인이나 집단이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개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하는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격도 합리적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격에 비합리적인 요소가 배어 있다는 것이다.
방법상의 논리: 계획의 논리 공공재나 준공공재의 적정 공급에 시장이 실패하며,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에 비합리적 요소가 끼어 있다면, 정부가 개입해서 무언가 해주어야 필요성이 있다. 경제학자도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 정부가 필요한가를 물을 때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학자들이 많다. 죄수의 딜레마의 효과적 해결에서 정부의 정당성을 찾는다. 죄수의 딜레마 현상은 계획주의가 특히 주목하는 현상이다. 계획주의가 말하는 계획은 정부가 죄수의 딜레마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절차와 방법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계획주의는 효과적인 계획을 통해서만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죄수의 딜레마, 나아가서 집단행동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계획주의는 집단적 합리성을 추구한다. 개인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집단적 합리성도 확보된다는 것이 시장주의의 기본 입장이지만, 계획주의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손’을 크게 신뢰하지 않으며, 설령 신뢰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계획주의자가 보기에 ‘보이지 않는 손’은 너무 느려서 탈이다. 구체적으로, 계획주의는 시장의 원리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시장주의에 의하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2,500백만의 인구의 상수원인 팔당 주변에 즐비한 음식점과 러브호텔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 업소의 주인들은 돈벌어 좋고 고객은 서비스를 받아 좋다. 그야 말로 상호이익이 증진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업소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는 상수원을 오염시킨다. 한쪽에서는 상호이익이 잘 증진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2,500만의 인구가 구정물을 마셔야 하는 날벼락을 앉아서 당한다. 이와 같이 엉뚱한 제3자에게 떨어지는 날벼락이 시장 주변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이것이 전형적인 외부효과의 문제인데, 계획주의는 이런 문제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고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 도사리고 있다. 누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상수원보호에 뛰어든단 말인가. 따라서 개인들의 합리적 행동에 맡겨서는 그런 제3자의 피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이 때에도 정부의 계획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계획주의자는 주장한다.
토지에 관한 주장 계획주의는 토지이용을 시장에 맡겨서는 국토이용의 효율을 이룰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토지는 다른 자원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획주의는 토지를 특별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토지는 그 특성상 남에게 나쁜 혹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이용하기 매우 어려운 자원이다. 내 땅이라고 내 마음대로 매연 공장을 지으면 주변의 불특정 다수에게 소음피해와 대기오염피해를 입히게 된다. 내 땅이라고 내 마음대로 집을 짓다가는 이웃집의 조망이나 일사량을 가로막음으로 인해서 상당한 피해를 주게 된다. 서울 복판의 북한산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고층아파트단지나 한강 주변에 병풍처럼 서 있는 고층아파트단지는 일반시민들이 북한산이나 한강을 보고 즐길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상당한 피해를 준다. 이런 불특정 다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토지의 계획적 이용이 꼭 필요하다고 계획주의는 주장한다. 위에서 예로 든 한강의 오염문제에 대해서도 계획주의는 시장주의와 견해를 크게 달리한다. 경제학자나 시장주의자는 환경세나 부과금과 같은 경제적 인센티브 방법을 통해서 환경오염행위를 직접 통제할 것을 고집한다. 반면에 계획주의자는 계획적 토지이용 및 토지이용규제를 통한 간접적 통제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경제적 인센티브가 최대한 의 효과를 낳도록 환경세나 부과금을 부과하자면 돈이 무척 많이 드는데, 경제학자나 시장주의자는 이런 사실을 깜박 잊는 경우가 많다. 환경오염행위를 일일이 적발하고 피해의 정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장비가 필요하다. 환경세나 부과금의 부과 및 징수에 소요되는 행정비도 적지 않다. 많은 경우 토지이용계획이나 토지이용규제가 훨씬 더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계획주의자는 주장한다. 이와 같이 목적에 이르는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도 계획주의와 시장주의는 큰 견해의 차이로 맞선다. 토지는 그 용도가 무척 다양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토지는 상품생산에 이용됨으로써 많은 혜택을 우리에게 줄 수도 있지만,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도 많은 혜택을 우리에게 베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리산의 울창한 산림과 비경은 있는 그 자체로서 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끗한 공기와 물을 공급하며, 생태계를 유지하고,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며, 관광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토지가 제공하는 이런 각종 혜택들의 가치를 흔히 공익적 가치 혹은 환경가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익적인 혜택(경제학적으로는 편익)들은 돈벌이가 잘 안되는 것들이다. 돈을 충분히 내는 사람들에게만 지리산의 공기를 즐기게 하기 매우 어렵다. 돈을 내는 사람에게만 지리산의 비경을 감상하게 하고 지리산의 물을 마시게 하기도 매우 어렵다. 이렇게 돈벌이가 잘 안되는 까닭에 공익적 편익을 제공하는 토지의 가격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가격이 낮다고 해서 가치도 낮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체로 보면,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토지의 가격은 가치에 비해서 매우 낮다. 따라서 아무도 공익적 편익을 제공하는 용도로 토지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상품의 생산에 토지를 이용하면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토지는 시장에서 제대로 가격이 붙는다. 대체로 가격과 가치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를 되도록 이면 상품생산에 이용하려고 하지, 공익적 편익을 제공하는 용도로 이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지이용을 시장에 맡기면 지나치게 많은 토지가 상품생산에 이용되는 반면 공익적 편익을 제공하는 토지가 너무 줄어들게 된다. 국토이용의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에 이용되는 토지와 공익적 편익을 제공하는 토지가 적정비율로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땅 조각의 용도가 가격이 아닌, 가치에 의거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공익적 편익을 공급하는 토지가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각 필지로부터 가치를 최대한 창출할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계획주의가 말하는 토지이용계획에 담길 사항이다. 토지이용문제를 경제학적으로 볼 때, 계획은 가치와 가격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다. 미래에 대한 좋은 정보를 싼 비용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데 투기꾼들이 바로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고 시장주의자는 말한다. 이런 주장이 부동산시장에도 적용될지 의문이지만, 어떻든 그렇다고 하자. 투기꾼들이 만들어내는 정보는 대체로 개인의 돈벌이에 관한 것들이다. 토지의 경우 돈벌이가 최고로 잘 되는 용도가 곧 사회적으로 최선의 용도는 아니다. 대한민국 국토의 각 부분이 사회적으로 최선의 용도에 이용될 때에 비로소 국토가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투기꾼들은 사회적으로 최선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개인의 돈벌이에 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공급함으로써 오히려 국토가 사회적 최선의 용도에 이용되는 것을 방해한다. 계획주의는 여러 가지 토지문제들 중에서 특히 난개발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난개발이야말로 각 개인이 공익을 무시한 채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 전형적인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계획주의가 부동산투기나 지가앙등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토지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본다. 부동산세의 강화나 개발이익의 사회적 환수만으로 토지문제가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고 본다. 높은 부동산세를 징수하고 개발이익을 잘 환수했다고 해서 예컨대 난개발 및 환경파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토지세를 잘 못 부과하다가는 오히려 난개발을 부추길 수도 있다. 오직 계획에 입각한 토지이용만이 난개발과 환경파괴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부동산투기나 지가앙등을 잡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계획주의자는 힘주어 주장한다. 녹지나 공원, 공공시설을 위한 토지 등을 충분히 확보하고 건물들 사이의 조화 그리고 건물들과 자연과의 조화를 잘 구현하는 토지이용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발한다면, 마치 개발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토지투기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획은 강력한 공권력의 뒷받침을 받아야 하며, 계획에 부합한 개인의 토지이용만이 허용되어야 한다. 토지에 관한 한 계획주의의 기본입장은 “계획 없이 이용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 토지이용에 관한 한 계획이 개인적 결정에 우선한다는 뜻에서 “계획고권”이라는 말을 쓰는 전문가도 있다. 개인의 합리성을 굳게 믿는 시장주의가 토지이용문제를 각 개인의 입장에서 보는 반면, 집단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계획주의는 사회전체의 입장에서 토지를 바라본다.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 국토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저 선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선물이요 우리 민족의 터전이며 우리 미래세대에게 물려주어야할 유산이다. 토지는 영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현 세대가 국토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미래세대의 이익이 크게 손상될 수도 있다. 토지이용을 시장에 맡기면 미래세대의 이익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혹시 미래세대의 이익을 고려하는 토지이용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직계자손의 이익까지만 생각하지 남의 자손의 이익까지 생각하면서 토지이용을 선택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시장에서는 모두들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토지를 거래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결정된 지가에는 미래세대의 이익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미래세대의 이익을 누가 대변할 것인가? 정부가 해주어야 한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부응하여 계획주의자는 잘 짜여진 계획을 통해서 미래세대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토지 얘기만 나오면 시장주의자와는 달리 계획주의자는 백년대계라는 말을 유난히 자주 꺼낸다.
4. 죠지스트 패러다임 가치관: 평등과 협동 죠지스트는 효율이 형평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평등을 매우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죠지스트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헨리 죠지가 고민했던 인류사회의 큰 수수께끼는 ‘풍요 속의 빈곤’이다. 인간은 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는 본성을 타고나며 또한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헨리 죠지는 굳게 믿었다. 그는 결국 이런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진보의 속도는 진보하려는 노력에 투입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에 비례한다. 그러나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그런 능력의 낭비적 소모를 초래한다. 헨리 죠지는 이 낭비적 소모의 정도가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보았다. 헨리 죠지는 협동적 결합과 평등을 합친 “평등한 상태의 협동적 결합이 진보의 법칙”이라고 단언했다. 다시 말하면 협동적 결합은 진보의 원천인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진보적 목적에 최대한 동원되도록 하는 요인이고, 평등은 인간 사이의 분쟁에 인간의 정신적 능력이 쓸데없이 소모되는 것을 방지하는 요인이 된다. 죠지스트는 사유재산권을 존중하고 시장의 원리가 좀 더 잘 작동할 수 있는 풍토의 조성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사유화는 진보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요 나아가서 나라를 망치는 주된 요인이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의 진보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토지사유화로 인한 폐해를 차단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는 것이 헨리 죠지의 주된 메시지이다. 그래서 죠지스트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처방은 주로 토지에 대한 논의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인식 투기-지가상승의 악순환과 경기변동 토지는 상품의 생산에 이용될 수도 있지만, 또한 토지는 재산보유나 재산증식의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토지는 귀금속, 주식, 채권, 은행예금 등 다른 투자대상들의 좋은 대체재가 된다. 자본이득이 충분히 크면 부동산이 좋은 투자대상이 되면서 때로는 막대한 자금이 금융권으로부터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간다. 반대로 자본이득이 떨어지면 부동산에 투입되었던 자금이 금융권을 통해서 산업부문으로 흘러들어간다. 이와 같이 부동산의 자본이득은 부동산시장과 금융권을 연결하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자본이득을 노린 부동산매입에 대하여 시장주의자가 투자라는 말을 잘 쓰는 반면, 죠지스트는 투기라는 말을 잘 쓴다. 죠지스트는 자본이득을 노린 부동산매입을 대체로 투기라고 본다. 좀 잘 나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부동산투기가 으레 만연하게 되며, 투기가 부동산가격을 더욱 더 높임으로써 거품을 형성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죠지스트는 생각한다. 반면에, 시장주의자는 부동산투기를 대체로 비합리적인 행위로 보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저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며 따라서 부동산가격 상승의 주된 요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시장주의자는 토지에 대한 투기를 넓은 의미에서 상품에 대한 투기의 일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헨리 죠지는 일찍이 토지투기와 상품투기를 엄격히 구별할 것을 요구하였다. 상품에 대한 투기는 해당 상품의 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상품공급을 증대시킨다. 이 공급증대는 다시 상품투기를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상품투기에는 자율적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토지의 공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투기의 경우에는 상품투기의 경우에서처럼 자동제어 장치가 없다. 그러므로 토지투기의 경우에는 자기상승이 투기를 조장하고 투기는 지가상승을 더욱 더 부채직하는 악순환의 반복이 가능해진다. 죠지스트는 이런 악순환의 결과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잔뜩 끼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시장주의자와는 달리 죠지스트는 부동산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동산가격을 정당한 가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가격이 왜곡되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왜곡을 교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죠지스트 주장의 핵심이다.
경기변동과 토지투기에 관한 헤리슨의 주장은 다음 세 가지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첫째,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급등이 곧 바로 경제위기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건설경기를 위축시킨다. 즉, 건설경기는 토지투기의 경제적 해악을 국민경제 전체에 전파하는 전달 장치라는 것이다. 둘째,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급등은 국민경제의 가용자금을 토지시장에 집중시킴으로써 기업들의 자금 확보를 어렵게 한다. 이 결과 금리가 상승하고 이어서 투자가 위축된다. 셋째,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급등은 주택가격 및 전세가격과 건물임대료를 상승시킴으로써 노동자계층의 가계를 압박한다. 이 결과 한편으로는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계층의 소비가 위축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이 임금상승을 요구하면서 생산비상승을 유발하게 된다. 헤리슨의 자료에 의하면, 이러한 지가-건축경기-경제불황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비단 미국뿐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관측된다.
금융과 거품의 확대재생산 죠지스트의 이론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내용은 금융기관의 신용창출을 토지투기와 지가상승 사이의 연결고리로 삼고 경기변동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주의자가 토지의 효율적 이용에만 집착하는 반면, 죠지스트는 국민경제의 한정된 자본의 효율적 이용에 주목한다. 왜냐 하면, 지가가 자본의 효율적 이용에 심대한 영향을 줌으로써 경제 전체의 움직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죠지스트는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지가폭등파동이 금융기관의 담보대출을 크게 증가시킴으로써 거품의 확대재생산을 발동시켰다고 주장한다. 토지가 재산보유 및 재산증식의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은 토지가 좋은 담보물이 된다는 뜻이다. 지가가 상승할 때에는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토지는 무척 매력적인 담보물이 될 뿐만 아니라 좋은 투자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의 금융기관 대출 중에서 토지담보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토지를 담보로 잡힐 때, 평상시 은행은 시가의 70% 정도만 담보가치로 보고 이 값의 70% 정도의 금액을 대출해주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은 땅값의 약 50% 정도를 은행으로부터 대출 받는 것이 보통이다. 땅값이 오르면 토지의 담보가치가 높아지므로 개인이나 기업은 금융기관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대출 받을 수 있다. 즉, 땅값의 상승은 직접적으로 금융기관의 대출규모를 증대시킨다. 그러나 땅값의 상승은 다른 경로로 금융기관이 대출규모를 증대시킬 수도 있다. 특히 지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때에는 더욱 더 그렇다. 땅값이 오른다는 보장이 있을 때에는 금융기관은 땅값의 50%보다도 더 많은 금액을 개인이나 기업에 대출해주는 것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리는 길이다. 땅값 상승이 매년 반복되면 금융기관은 땅값 대비 대출금의 비율을 점점 더 높이게 되며 이 결과 동일한 토지에 대한 대출규모도 점점 더 커진다. 심하면 땅값의 100%에 해당하는 만큼 대출해주는 사태도 발생한다. 이와 같이 땅값 상승은 금융기관의 대출규모를 2중으로 증대시킨다. 개인이나 기업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 받으면, 이 돈을 시설확장에 투자하거나 부동산매입에 투자하게 된다. 그러면 토지수요가 증가하고, 이 결과 땅값이 뛴다. 땅값이 뛰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금융기관의 대출규모는 2중으로 증가한다. 대출규모의 증대는 개인이나 기업의 투지수요를 증가시켜서 또 다시 땅값을 올린다. 이렇게 지가상승 → 금융기관의 대출규모 증가 → 개인과 기업의 토지수요 증가 → 지가상승 → ․․․의 순환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지가거품의 확대재생산 과정이 반복된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현상이지만,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한, 바로 이런 거품의 확대재생산 현상이 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었던 현상이니 할 말이 없다. 지가가 떨어지면 위와는 반대로 지가하락 → 금융기관 대출감소 → 지가하락 ․ ․ ․ 의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거품의 붕괴과정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택개발업자, 부동산업자 등 토지관련 기업들의 연쇄도산을 초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를 담보로 한 금융기관의 막대한 대출을 부실채권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수많은 금융기관의 도산 내지는 경영위기를 초래한다. 바로 이런 거품붕괴과정이 일본경제를 10년 이상의 장기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인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 나라의 한정된 자본이 효율적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생산성에 의거하여 자본이 배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지담보에 의존하는 대출 관행은 생산성이 아닌, 토지소유규모에 의거하여 자본을 배분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걸친 자본이용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또한 그런 관행은 은행의 대출 심사 능력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서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대안 논리 죠지스트는 시장의 원리와 사유재산권을 적극 옹호하지만, 토지의 사유화는 극력 배격한다. 하지만, 이미 사유화되어 있는 토지에 대하여 사유재산권을 박탈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헨리 죠지 역시 사유화된 토지를 몰수해서 국유화하는 것은 결코 최선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헨리 죠지의 해명이 의미심장하다. 그런 조치는 토지에 대한 모든 사람의 동등한 권리를 표방한다는 대의명분은 있을지 모르나, 우선 토지몰수는 사회정의에 저촉될 우려가 있고, 국유화는 사회에 필요 없이 큰 충격을 줄 우려가 있으며, 또한 필요 없이 정부의 기능을 확장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헨리 죠지가 정부 기능의 확대를 경계하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왜 죠지스트는 토지의 사유화를 극력 배격하는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토지의 사유화는 토지투기와 지가앙등의 원인이요 나아가서 경제불황과 실업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토지의 사유화는 시장의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요인이 된다고 죠지스트는 생각한다. 헨리 죠지의 얘기를 들어보자. 모든 인간은 각자 노력의 산물에 대해서만 정당한 사유권을 가질 수 있을 뿐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사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토지란 대자연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산물이며,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사유권 인정은 노동의 산물에 대한 사유권 행사를 사실상 봉쇄한다. 토지는 모든 자연적 기회의 총체이고 모든 생의 기반이다. 헨리 죠지는 토지에 대한 사유권 인정을 공기나 물에 대한 사유권의 인정에 비유했다. 공기가 사유화된다면 노동의 산물에 대한 사유권 행사는 고사하고 생존 그 자체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공기를 가진 사람과 노동의 산물, 예컨대 빵을 가진 사람이 흥정을 한다고 하자. 단연 공기를 가진 사람이 흥정의 우위를 점할 것이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은 흥정도 제대로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대자연이 제공하는 기회를 자유롭게 이용할 권리 없이는 노동의 산물에 대한 사유권도 충분히 누릴 수가 없다. 한 사람에게 토지를 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 노동력을 주면 결국 토지를 가진 사람이 노동의 산물까지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토지를 가진 사람과는 아무도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 공정한 거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시장도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노동의 산물에 대한 사유권 인정은 모든 사람을 평등한 관계에 놓는 반면, 토지에 대한 사유권 인정은 사실상 인간의 평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헨리 죠지는 역설하면서,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됨을 보였다. 헨리 죠지에 의하면, 토지의 사유화는 인류사회의 진보의 원리인 “평등한 상태의 협동적 결합”을 손상시킴으로써 한 사회를 망하게 하는 씨앗이 된다. 죠지스트가 이와 같이 토지의 사유화에 극력 반대하면서 동시에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을 표면상 인정하되 토지이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순이익, 즉 지대를 몰수하는 것이다. 헨리 죠지의 말로는 “진실로 필요한 것은 토지의 몰수가 아닌, 지대의 몰수”이다. 지대를 몰수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헨리 죠지는 토지단일세 제도를 제안하였다. 토지단일세제도는 토지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조세를 없애고 정부의 재정은 오직 토지세만으로 충당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때의 토지세는 지대를 100% 환수하는 조세를 말한다. 토지세만으로 충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겠지만, 헨리 죠지가 염두에 둔 정부는 그야 말로 최소한의 작은 정부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흔히 토지사유화는 토지의 최적이용, 토지의 생산성 제고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토지에 대한 사유권 인정이 아니라 생산성 향상으로 인한 과실에 대한 권리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이다. 헨리 죠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지를 경작하게 하고 또한 이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굳이 ‘이 토지는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 토지로부터 당신이 생산한 것은 바로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헨리 죠지가 제창한 토지단일세는 그 뜻은 매우 좋지만, 현실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죠지스트는 토지보유세를 대폭 강화하는 반면 다른 조세들은 대폭 감면할 것을 요구한다. 죠지스트는 건물에 대한 조세에 반대한다. 건물에 조세는 건축활동을 위축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건물의 가격을 높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죠지스트는 토지에 대한 양도소득세, 거래세, 취득세 등에도 반대한다. 양도소득세는 장기적으로는 전가되며, 거래세나 취득세는 토지거래를 위축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토지거래가 위축되면 건축활동도 위축된다. 지가앙등과 토지투기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죠지스트는 토지보유세와 더불어 개발이익환수제도 및 개발부담금제도 등 경제적인 수단을 강력하게 실시할 것을 주문한다.
5.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 마르크스주의 가치관과 대안논리 잘 알려져 있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비판은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파괴하는 과정에 대한 매우 논리적인 주장으로 꽉 차 있다. 요컨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마르크스주의 가치관에 있어서 인간다움 혹은 인간성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마르크스나 그에게 큰 학문적 영향을 미친 독일 철학자들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예를 들어서 포이엘바흐에 의하면, 동물은 오직 개체의식만 가지고 있다.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주의는 동물적 속성이며 따라서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바람직한 인간 고유의 본성(human essence)을 마르크스는 잠재력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잠재력이 더 충실히 구현될수록 그 인간은 더 인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이 잠재력의 발휘가 저해될수록 비인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독일 철학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체제나 제도가 다름에 따라 이 인간본성이 발휘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소외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소외란 제도적 요인으로 인해서 인간 고유의 잠재력이 발휘되지 못한 결과로 겪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소외란 인간성을 상실한 상황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잠재력 발휘를 저해하는 체제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에 있어서 요체요 바로 그런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기심을 예로 들어보자.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주의는 동물적인 것이요, 인간의 본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결과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 뿐만 아니라 체제유지를 위해서 이기심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함으로써 국민들을 더욱 더 이기적으로 만든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체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처럼 생각하고 동물처럼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시장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장소이다. 시장에서는 누구나 자기 이익만 챙긴다. 사실 장바닥에서나 직장에서나 이타적으로 행동해봐야 손해 보기 일쑤다. 시장원리의 핵심은 경쟁이다. 남이야 어떻든 자기이익만 부지런히 챙기는 사람은 돈도 잘 벌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반면에 겸손하고 남을 잘 배려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배겨나기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이런 시장의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보면 사람들이 더욱 더 이기적이 되고 도덕적으로 무디어지며, 결국 상품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는 현실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는 이기심이나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다. 자본가와 시장주의자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경제학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경제학은 은근히 이기심, 이기주의를 정당화한다. 비록 각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사회전체의 이익 역시 자동적으로 증진된다는 것, 이것이 경제학의 핵심적 주장이다. 요즈음의 경제학은 인간이 이기적임을 명시적으로 전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합리적임을 전제한다. 하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결국 각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리성이다. 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으로 만든다. 이를 증명하는 실험결과도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억지로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경제학자나 신자유주의자가 변명할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비록 사람들로 하여금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강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마치 이타심은 필요 없다는 식의 인상을 줌으로써 이타심의 중요성을 격하할 것까지는 없다고 마르크스주의자는 반박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타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직 소수의 `중요한` 몇몇 사람들만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개인의 합리성을 굳게 믿는 시장주의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개인에게 자유를 풍부하게 제공함으로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도와주는 체제라고 맞받아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도 자유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만, 자유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시장주의자가 간과하고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자본주의 시장이 풍부하게 제공한다는 자유는 알맹이가 없는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통해서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에 나가보면 별별 것이 다 있다.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시장주의자의 주장대로 확실히 사람들은 시장에서 풍부한 선택의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상품에 대한 폭넓은 선택의 자유는 인간 잠재력의 개발이나 발휘에 결정적 요소는 아니다. 대체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때 가장 행복하고 그 일을 성취하였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보람 있는 일이 곧 잠재력 발휘의 가장 큰 계기요, 행복의 원천이다. 물론, 마음에 드는 옷이나 가전제품을 샀을 때에도 보람을 느끼겠지만 그로 인한 행복감은 대체로 일시적이며 깊지 못하다. 보람 있는 일에 몰두하다가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뿌듯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마음껏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자유야 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진정한 자유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나쁜 체제라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외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남 돈벌이의 도구 역할, 달리 말하면 임금노동이나 하면서 나날을 보낸다. 이들은 좋든 싫든 그저 회사가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할 뿐이다. 시키는 일의 내용이나 일시키는 방법에 대한 불평은 용납되지 않는다. 직장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임금노동은 상품화된 노동이다. 상품화된 노동은 대체로 고되고 기계적이며 깊은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노동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잠재력 발휘와 큰 관계가 없는 일에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한다. 자영업을 하는 기업인들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많은 기업인들이 돈벌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역시 잠재력 개발이나 발휘의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구조화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은 노동자에게나 기업인에게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직장이 자유와 자주성 그리고 보람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상품시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푹푹 쌓인 스트레스를 상품시장이 제공하는 각종 향락과 소비재를 만끽하면서 해소하려고 애를 쓴다. 예를 들면, 음주문화, 노래방, 성행위, 전자오락, 도박, 식도락, 심지어 마약이나 환각제 등에서 낙을 찾으려하고, 옷치장, 보석, 몸매 가꾸기, 집치장, 자동차치장 등 잠재력 개발이나 발휘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마르크스는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장점을 높이 샀고,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린 자본주의 극복을 역설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폐해가 노동의 상품화 그리고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사유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제안한 대안은 공산주의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이유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사회구성원들을 물질적으로 보다 더 잘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차원 높은 욕망과 보다 더 우월한 재능을 가진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선, 자본주의에 의해서 말살된 인간의 자주성을 최대한 살려내도록 생산활동을 재조직해야 하며 노동이 고역이 되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르크스가 제안한 두 가지 중요한 방안의 하나는 사회구성원의 참여를 바탕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중앙계획을 통해서 사회구성원 각자의 생산적 활동을 전반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분업을 철폐하는 것이다. 분업화나 전문화는 인간을 조그마한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의 그러한 제안을 현실에 옮길 구체적인 제도나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짧은 인생을 마쳤다. 민주적 중앙계획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계획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소득분배의 형평성이나 분배의 정의에 관해서는 강한 주장을 별로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나름대로의 어떤 뚜렷한 정의관에 입각해서 자본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임을 강하게 암시는 했을망정 노골적으로 이를 표현하기를 삼가 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까닭은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서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나 빈부격차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득분배가 골고루 잘 된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데, 노동이 상품화되고 자본가계급이 존재하는 한 이 모순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은 결국 사회가 정한 원칙을 잘 지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정의의 원칙에 있어서 주된 내용은 사회구성원 각자의 정당한 몫에 대한 규정들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개념에 있어서 핵심은 각자의 정당한 몫을 어떻게 보느냐에 집중된다. 정의로운 사회는 우선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히 가르고 그리고 각자는 자기의 몫을 정확하게 챙기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하게 가르고 각자 자기의 몫을 주장하고 정확하게 챙기는 사회가 과연 우리가 지향할 이상적인 목표로서의 사회인가? 우리 사회에 부정이 만연하다 보니 정의에 대한 요구가 많은 것은 당연하고 그리고 정의사회의 구현은 시급한 우리 사회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의사회의 구현을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는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의사회의 구현에 너무 집착해서 더 소중한 것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재미있는 사회, 인정이 넘치는 사회, 나아가서 정의 그 자체가 필요 없는 사회가 마르크스가 그렸던 이상적 사회다.
현실 인식 마르크스는 인간이 합리적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나 헨리 죠지 모두 인간에 대하여 대단히 긍정적이었으며 인간의 잠재력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방해요소들이 있다. 소위 “이데올로기 산업”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각종 교육기관과 종교단체 그리고 홍보 관련 각종 정부기관들이 그것이다. 각종 교육기관은 은연중에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며 자본주의 폐해를 은폐하고 현실을 호도한다.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의 비인간적 처사를 참고 견디게 만들며 비참한 생활에 위로를 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간접적으로 두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린다. 마르크스주의는 시장주의가 주장하는 시장의 원리에 대단히 비판적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은 죠지스트 패러다임이나 시장주의 패러다임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우선, 거래를 통한 상호이익 증진의 원리부터 살펴보자. 계획주의는 외부효과의 예를 들어서 이 원리를 비판하고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마르크스주의도 여기에 동조하지만, 문제가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실, 외부효과의 문제는 경제학자나 시장주의자도 인정하는 시장의 실패 현상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거래를 통한 상호이익 증진의 원리에 따라 시장에서 벌어지는 사익추구 행위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국 모두의 이익이 증진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고 시장주의자는 이점을 열심히 강조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 인간마저 지배하면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주먹”이 된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다. 예를 들어보자.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무엇을 생산하며 또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언뜻 보면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각 기업은 시장에서 팔릴 것만 생산해야 하고 또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장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지 생산자가 자기 뜻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상품이 잘 팔린다고 하면 기업들은 좋든 싫든 온통 그것의 생산에 매달리다가도 이 상품이 안 팔리기 시작하면 기업들은 좋든 싫든 그것의 생산을 접어야 한다. 이와 같이 기업은 시장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고 노동자는 고용자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현실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활동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이 시장이란 비인격적인 힘이다. 시장의 힘이란 수많은 각 개인들의 경제적 결정이 집결된 것이며, 이 속에서 각 개인은 단지 극히 미세한 존재에 불과하다. 각 개인은 시장에서 결정된 것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순응할 뿐이다. 따라서 생산활동을 포함한 사회의 중요한 경제활동이 사회구성원 각각의 의식적 결정에 의해서 통제될 여지가 없다. 경기가 나빠져서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양산될 때 국민은 누구나 경기가 살아나기를 절실히 원하지만, 경기나 경제란 사람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심한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예를 들어서 1997-98 IMF경제위기 때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을 때,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산과 실업의 고통을 당한 사람들 대부분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시장에서 일단 가격이 결정되면 모든 생산자들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다. 시장은 이 가격보다 비싸게 생산하는 생산자에게는 가차 없이 경제적 손실을 입혀 무능의 책임을 추궁한다. 시장이라는 것이 명목상으로는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이 모여 가격과 거래량에 대해 흥정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에서는 가격과 거래량이 본질적 실체가 되고 사람은 가격의 장단에 맞추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며, 그 권능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인간이 여태까지 적응해온 대자연을 대하듯 시장을 대하게 된다. 즉 시장은 제2의 자연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상품의 세계나 시장은 분명히 인간이 만든 것이다. 이같이 경제주체들의 행위가 상품들 사이의 양적 관계에 의해서 지배됨으로 인해 사람들이 만든 사물인 상품들이 마치 생명력을 가진 독자적 존재인 양 취급되는 현상을 마르크스는 상품물신숭배(fetishism)라고 했다. 언뜻 보아 난장판 같은 시장에도 일종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경제학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법칙을 알아내고 응용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장의 현상에 어떤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마저도 그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장은 우리 인간이 만든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때로는 우리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시장관이다. 경쟁의 원리나 경제적 인센티브의 원리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무척 비판적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돈과 경쟁심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을 치사하고 더럽고 비참하게 만들며, 경쟁심은 인간관계를 파괴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사실 많은 보통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 확실히 돈과 경쟁심은 사람을 움직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이런 효과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시장의 강점이자 또한 시장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애국심이나 애향심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고, 자비심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고, 자존심이나 명예심, 수치심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 고상한 방법이 있는가 하면 저속한 방법이 있고, 당당한 방법이 있는가 하면 치사한 방법이 있다. 보통은 진한 감동을 주어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상책으로 꼽는다. 그러나 돈에 호소하는 방법은 가장 저속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친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혹은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태도를 사람들은 저주한다. 그런 치사한 방법에 자주 의존하다보면 사람 자체도 치사해지고 더러워진다. 경제적 인센티브제도는 결국 국민을 치사하고 더럽게 만드는 제도다. 국민이 치사하고 더러워지면 사회도 망하게 된다. 시장주의자는 돈과 경쟁심의 중요성과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마치 돈과 경쟁심이 개인발전과 사회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그런가? 한글은 세종대왕이 거의 독자적으로 만든 위대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세종대왕이 돈벌이나 경쟁심에서 한글을 창제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공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제로, 뉴톤, 아인슈타인, 프러이드, 마르크스, 베토벤, 모찰트 등 인류 역사상 기라성 같은 위인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들이 단순히 돈벌이 욕심과 경쟁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위대하다. 계획주의처럼 마르크스주의도 가격과 가치를 철저하게 구별하며 이 둘이 달라질 때가 많다고 본다. 가격과 가치의 구별은 현상과 본질의 구별에 대응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늘 현상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을 보라고 요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사회를 변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이며 그 요인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보아야만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주의는 주장한다. 시장에서 일상 관측되는 상품의 가격은 현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가격은 부단히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아담 스미스는 이 가격이 제멋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에는 어떤 중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무게중심’을 자연가격이라고 불렀다. 이 ‘무게중심’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가치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란 일단의 어떤 특정 사회관계 아래에서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사물이 갖게 되는 특성이다. 가격은 가치가 금전으로 표시되어 겉으로 나타난 양적 차원의 현상이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말하는 가치란 상품의 생산에 직접․간접적으로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노동이 상품화되지 않고 생산수단이 사유화되지 않은 사회(마르크스가 말하는 단순상품생산 사회)에서는 가치와 가격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치가 가격과 달라진다. 가치와 가격이 달라지는 이유는 자본주의체제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시장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가격을 설명하고 예측하려는 이론이 아니라 그런 가격의 무게중심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변화의 동인을 파헤치려는 이론이다.
토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주장 죠지스트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 모두 토지의 사유화를 극력 반대하지만, 죠지스트 사상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토지의 사유화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이고 중차대한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모순으로 차 있는데 모든 모순의 근원은 노동의 상품화와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사유화이다. 따라서 토지의 사유화를 완전히 철폐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다수의 문제들 중에서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될 뿐이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근원적 모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노동의 상품화와 다른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정되는 한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우선 토지를 보는 시각에서부터 죠지스트 사상과 크게 다르다. 죠지스트는 생산요소를 노동, 자본, 토지의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자본과 토지를 별개의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분류를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요소를 크게 노동과 자본으로 분류하고 토지를 자본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실제로 기업의 행태를 보자. 일단 상품생산으로 돈을 좀 벌면 기업은 이 돈으로 토지를 많이 사둔다. 토지는 은행의 융자를 받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하고, 땅값이 많이 오를 때 팔아서 막대한 자본이득을 챙기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업은 상품생산으로부터의 통상적인 이윤뿐만 아니라 토지로부터의 자본이득까지 고려한 “결합 이윤”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생산으로부터의 이윤이 저조하더라도 땅값만 잘 올라가 주면 기업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축적의 논리가 토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지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상황에서 토지는 자본축적의 좋은 수단이 된다. 사실, 과거 수많은 부실기업들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떵떵거릴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속적 지가상승 때문이었다. 지속적 지가상승이 기업의 부실경영을 키우는 요인이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토지를 자본의 일부로 간주하기 때문에 지주계급을 자본가계급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는 토지소유자와 자본가는 한 통속이어서 구별이 잘 안된다. 이들의 용어로는 지주계급은 내포계급에 속하며 자본분파이다. 따라서 토지소유자는 자본가계급의 의식과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대체로 보면, 죠지스트는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연합전선이 지주계급에 대항하는 갈등구도로 묘사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갈등구도로 그린다. 시각을 토지문제에 한정한다면, 지대를 몰수하다시피 하는 고율의 토지세를 부과하는 죠지스트 방안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는 긍정적이다. 원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과 헨리 죠지의 경제이론은 리카도의 경제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카도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고전학파 경제학으로 완성시킨 경제학자이다.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이 마르크스 경제이론으로 이어졌다면, 리카도의 지대론은 헨리 죠지의 경제이론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도 리카도의 지대론을 그 나름대로 발전시켰다. 토지세에 대한 리카도의 주장, 즉 토지세를 통한 지대의 사회적 환수는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불로소득을 감소시키고, 세수를 사회발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마르크스주의자도 대체로 수용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죠지스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생산수단 사유화의 철폐라는 큰 틀 안에서 토지사유화의 철폐를 일관성 있게 요구한다. 시장주의는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잘 보장되어야만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주장을 부정한다. 토지가 국유화 혹은 공유화되어 있어도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개발되고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 국유화 혹은 공유화된 토지가 효율적으로 잘 이용되는 사례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진 미국 뉴욕의 맨하탄 일대의 토지는 시유지이지만, 매우 효율적으로 개발되고 이용되고 있다. 중국 상하이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어마어마한 대규모 고밀도 개발에 입이 딱 벌어진다고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에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인정되지 않는다.
6. 맺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동산을 둘러싼 4가지 패러다임은 가치관에 있어서나 현실인식 그리고 방법론적 논리에 있어서 서로 상당히 다르다. 대체적으로 보면, 시장주의 패러다임과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죠지스트 패러다임과 계획주의 패러다임은 이 양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죠지스트 패러다임이 평등지향적이고 시장주의 패러다임이 효율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시장을 신봉하고 시장원리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 두 패러다임은 상당히 가까워 보인다. 다만, 토지문제를 놓고는 이 두 패러다임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계획주의는 공익을 중시하고, 개인들의 합리성이 집단의 합리성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민주적 중앙계획을 통해서 집단적 합리성을 구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과 상당히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계획주의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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