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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영상: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2008.9.17)
기타
| 2009/01/22 10:00
2008년 9월 17일 환경대학원에서 열린 이정전 선생님 특별강연 동영상입니다.
동영상 주소
http://video.google.co.kr/videoplay?docid=-2544405884467112432&hl=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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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자료입니다.
080917특별강연.pdf
목차
1.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적대적 공동연구
2. 허수아비를 둘러싼 패싸움?
3.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행태경제학
4.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이하는 첨부파일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이정전
1.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적대적 공동연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의 골이 왠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성장, 분배, 환경보전, 노동문제 등을 둘러싸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대립, 잘 사는 계층과 못 사는 계층의 대립,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최근에는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겹쳐지고 있고, 이제는 종교의 대립 기미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주화 투쟁에서 수많은 생명까지 잃는 엄청난 희생을 이미 치렀는데도 온갖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시회적 진통과 국력소모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하더라도 광우병 촛불시위로 한 때 국정이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대립과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갈등과 대립이 건설적인 변화의 씨앗이 되면서 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진통과 희생을 치러야할 것인가 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참혹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큰 진통 없이 지혜롭게 헤피 엔드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역사는 그런 사회적 갈등과 대립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을 띠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에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경우 갈등과 대립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중요한 불씨는 상대방을 묵살하고 적대시하는 태도입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가장 귀가 따갑게 듣는 말은 “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느냐.”, “당신들이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입니다. 심지어 언론도 이런 식의 적대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으로 편 가르기를 노골적으로 부축이고 있습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구시대의 퇴물들은 이제 그만 물러가야 한다.”라든가 “좌파를 싹 쓸어버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등 듣기 거북한 언사들을 유난히 자주 듣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묵살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는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희생과 국력소모를 오히려 더욱 더 조장할 뿐입니다. “구시대의 퇴물은 물러가야 한다.”는 태도나 “좌파는 쓸어버려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자세를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우리 시대의 갈등과 대립은 결코 원만하게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사회지도층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 지도층이 광우병문제에 대하여 좀 더 솔직하고 진지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응하였더라면 촛불시위로 인한 그런 끔직한 불상사는 피해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에 대한 우리 학계의 태도 역시 큰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할 학자들도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 세태에 휩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한반도 대운하건설을 둘러싼 학자들의 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의 찬반토론은 감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로 얼룩졌을 뿐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었던 소모전이었습니다. 일방적 주장 그리고 “좀 더 잘 알고 나서 얘기해라.”라든가 심지어 “미국에 가서 공부 좀 더해라.” 등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묵살하는 언사가 난무하였습니다. 그렇게 상대방을 묵살할 수 있을 정도로 대운하에 대한 주장이 과학적 사실에 확고하게 정초하고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아주 기초적인 자료조차 축적되어 있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화물선이 다닐 수 있는 물길을 내기 위해서는 강바닥을 6미터 이상 깊게 파내야 한답니다. 이럴 때 강바닥에서부터 6미터 아래 까지가 모두 모래나 자갈이라면 그것을 파내거나 혹은 진공청소기 같은 기계로 빨아올리는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질학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나라 강바닥 밑을 2,3미터만 파고 내려가면 온통 암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암반을 모두 깨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모래를 퍼 올리는 것과 암반을 깨부수는 것은 공사비에 있어서 천양지차입니다. 사실, 집을 지을 때에도 땅을 파다가 암반이 나와서 공사비가 몇 배로 뛰었다는 얘기를 주위에서 가끔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400 킬로미터 넘는 긴 물길 중에서 암반을 깨야 하는 부분과 그냥 모래만 퍼 올려도 되는 부분의 비율이 각각 얼마인가 입니다. 80%?, 60%?, 40%? 하천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공학자의 대답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세밀한 조사가 없어서 우리나라 강바닥 밑의 2, 3미터는 고사하고 단 10센티미터 밑에도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료부족 현상은 대운하 토론회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였던 수질오염, 홍수, 생태계 파괴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쪽에서는 대운하를 건설하더라도 수질오염문제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대 측에서는 대단히 심각할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양쪽의 주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중립적 전문가의 얘기를 들어보면, 솔직히 말해서 대운하 건설이 어느 정도의 수질오염을 초래할지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엄밀한 대답하기에는 현 시점에서 축적된 자료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수질오염을 예측하는 모형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지만, 그 모형에 집어넣을 기초적 자료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개탄합니다.
엄밀한 과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저번 대운하 사건은 애당초부터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적대적 논쟁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몇 년 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바 있는 카네만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논쟁은 시간낭비이다. 논쟁에서 상대방에게 승복하거나 논쟁을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화를 내면서 학문을 하는 것은 비참한 경험이다.” 그는 현재 사회과학 논쟁의 한 형태인 비판-대응-재대응의 틀 대신에 적대적 공동연구(adversarial collaboration)를 시도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적대적 공동연구란 신의성실의 원칙아래 말 그대로 적대자들이 공동연구 사업을 수행하는 것인데, 제3의 중립적 인사가 자료수집과 연구수행을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견해가 크게 엇갈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우리 학계에서도 카네만교수가 말하는 적대적 공동연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운하건설 계획의 경우 관련된 전문가들이 소모적 논쟁을 하는 대신 적대적 공동연구를 통해서 쟁점을 잘 정리하고 공동으로 조사하고 자료를 발굴하며 그 위에 이론을 잘 적용하였더라면, 견해의 차이를 크게 좁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 허수아비를 둘러싼 패싸움?
현장 조사를 하고 자료를 축적하는 것은 현실을 잘 알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인식할수록 갈등이나 대립은 적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갈등과 대립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경제가 불황 국면에 있는지 혹은 회복국면에 있는지를 놓고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이 큰 견해 차이를 보이면서 대립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책도 크게 달라짐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한다고 해서 의견충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관의 차이가 의견충돌과 대립을 낳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 부동산 투기가 매우 심하다는 데에 모두들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부동산투기를 좋게 보는 사람들과 나쁘게 보는 사람들은 심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득분배 문제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현실인식의 차이보다 가치관의 차이가 대립의 더 근원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다르면 현실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치관의 차이가 현실인식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심리학 교과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똑 같은 현실을 볼 때에도 보수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잘 부합하는 사실들만 주목하고 받아들이며 잘 부합하지 않는 정보들은 차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자신들의 가치관에 따라 현실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구미에 맞게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가치중립적인 주장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치관의 차이가 현실인식의 차이를 낳으며, 갈등과 대립의 근원적 원인이라고 하면, 이것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가치관에 대하여 까놓고 토론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네만교수가 제안하는 적대적 공동연구의 틀 속에서 대립된 가치관을 명시적으로 다루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설정한 목표가 올바른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대로 추구하고 있는지를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현재 우리 사회가 벌이고 있는 많은 갈등과 대립이 부질없는 공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나 선진국에 있어서나 경제성장이 국정 최고목표이었습니다. 분배의 문제가 제기되면, 성장을 통해서 해결하자는 논리가 동원됩니다. 환경문제가 제기되면, 아직 우리는 환경문제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든가 또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전의 조화를 통해서 해결하자는 공허한 논리가 동원됩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대하여 우리는 그릇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경제성장이 곧 우리의 행복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인당 소득수준이 2만 불 이하인 나라에서는 이런 생각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선진국에서는 옳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반세기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소득수준의 향상이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현상을 흔히 “행복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을 밝혀낸 학자들은 사회과학자들이 아니라 주로 자연과학자들, 특히 두뇌과학자나 신경심리학자들입니다. 말하자면, 행복의 역설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왜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이미 소상히 밝혀졌습니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소위 행복경제학이 선진국에서 최근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소득과 행복에 관한 과학적 발견을 잘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 만큼 돈과 행복에 관한 고정관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살아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자들, 특히 첨단 과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으면서 행복에 대한 이들의 얘기는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니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2만 불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앞으로 5, 6년 후면 4만 불대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단순히 소득수준의 향상만으로는 우리국민의 행복지수를 크게 높일 수 없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경제성장의 약발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경제성장에 목을 매야 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다른 중요한 가치들, 예컨대 평등과 환경을 희생해야 합니까?
만일 경제성장이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로 작정한다면, 경제성장과 환경보전 혹은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를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 혹은 보수와 진보가 쫙 갈려서 얼굴을 붉힐 건더기가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행복의 관점에서 조정해야할 문제로 축소됩니다. 우리는 해마다 30조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돈을 사교육으로 날린다고 하는데,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런 부질없는 낭비는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사교육은 자녀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기로 작정한다면, 사실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각 개인의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육제도, 가족제도, 기업풍토 등이 모두 크게 달라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는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할 문제입니다. 여기에 굳이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로 갈려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행태경제학
소득수준의 향상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과학적 발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소득수준의 향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행복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한다면 결과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 모두 더 행복해질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단, 우리 모두가 합리적이고 심지도 굳다면 말입니다. 사실, 경제학을 비롯한 많은 여러 학문분야가 인간의합리성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전제를 부인하여 왔습니다. 최근 들어 두뇌과학과 신경심리학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일상 행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무수히 많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흔히 행태경제학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요컨대 우리 인간은 흔히 말하듯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이상한 행동은 특히 불확실한 상황에서 두드러집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합리성에 맞지 않는 이상한 행동이 가장 빈번히 그리고 일관성 있게 관찰되는 상황은 확률의 예측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서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야구팀과 축구팀이 동시에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그 어느 한 팀만 금메달을 딸 가능성보다 분명히 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팀이 동시에 금메달 딸 확률이 단 한 팀만 금메달 딸 확률보다 높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결합의 오류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 결합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결합의 오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실험의 예는 소위 린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선 피실험자들에게 젊고 성실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계산을 잘 하는 여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나서 이 여성이 다음 중 어떤 사람일 가능성이 가장 높으냐고 묻습니다: ➀은행여직원; ➁여성운동을 하는 은행여직원; ➂전업 가정주부. 실험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여성이 여성운동을 하는 은행여직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대답합니다.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여성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은행여직원이 될 확률은 단순히 은행여직원이 될 확률보다 낮지 않으냐고 반문하면 그제 서야 잘못을 인정합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태에 대한 수많은 연구결과를 전망이론(prospect theory)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 공로로 이들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이론에 의하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합리성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행동양태를 보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15만원을 따고 뒷면이 나오면 10만원 잃는 놀음을 사람들에게 제안을 한다고 해봅시다.
경제적 합리성에 의하면, 분명히 이익이 되는 게임입니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이 놀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게임을 거부합니다. 딸 때 이득이 잃을 때 손실의 최소한 두 배 이상이 되어야 놀음에 응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이익보다는 손실에 대하여 더 민감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컨대 10만원 딸 확률이 50%이고 10만원 잃을 확률이 50%인 게임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이익으로 이한 만족의 강도보다 손해로 인한 불만족의 강도가 더 크기 때문에 손실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회피하는 성향을 손실혐오(loss aversion)라고 합니다.
이러한 손실혐오 성향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기를 매우 싫어합니다. 똑같은 물건인데도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 부여하는 가치와 가지고 있지 않을 때 부여하는 가치가 크게 다릅니다. 얼마나 달라지는지, 많은 학자들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동일한 커피잔을 놓고 피실험자들에게 그 잔을 산다면 얼마를 지불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잔을 피실험자들에게 주고 나서 만일 그 잔을 판다면 얼마를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실험결과에 의하면, 수용용의액이 지불용의액의 약 7배까지 차이가 났습니다. 이와 같이 보유하고 있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을 보유효과(endowment effec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용용의액과 지불용의액의 차이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보다는 공공재의 경우에 더 커진다고 합니다. 어떻든 이 두 용의액 사이의 큰 차이는 가치평가의 의미를 애매하게 하며, 비용-편익분석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대체로 보면, 사람들은 장기적 안목으로 생각하고 선택하기보다는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는 성향이 강하며, 포괄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음악회가 열린다고 해봅시다. 입장권은 5만원 입니다. 두 가지 경우를 설정해봅시다. 첫 번째 경우로, 극장에 가다가 보니 소매치기를 당해서 5만원을 잃었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무사히 극장 앞에 가서 입장권을 사놓은 다음 근처에서 차를 한 잔 마시는 동안 입장권을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학적으로 보면, 5만원의 손실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 두 경우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손실의 형태가 한 경우에는 현금이고 다른 경우에는 입장권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두 경우에 다르게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금을 잃었을 때는 이에 개의치 않고 음악감상을 하는 반면, 입장권을 잃었을 때는 음악회를 포기합니다. 왜 그런가? 입장권을 잃었을 때 입장권을 또 산다는 것은 음악회에 돈을 두 번 지불하는 것으로 계산합니다. 반면에, 현금을 잃었을 때에는 음악회에 돈을 한 번 지불하는 것으로 계산합니다. 마치 사람들은 마음속에 여러 개의 계정을 설정해놓고 각 계정별로 독립채산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런 현상을 정신적 회계(mental accounting)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얼른 혹은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달리 말하면, 직감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학자가 미국의 명문대학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야구 방망이와 공을 사려면 합쳐서 만 천원이 필요하다. 방망이는 공보다 만원 더 비싸다. 공의 가격은 얼마일까?” 과반수가 천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천원이 얼른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정답이 5백 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국인에게 미국에서 타살이 많은가 자살이 많은가를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살이 많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에 나타난 살인기사의 빈도를 바탕으로 추정하고 질문에 대답합니다. 달리 말하면 언론의 살인기사가 얼른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에 이것을 대푯값으로 간주하고 이런 틀린 대답을 태연하게 제시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웃에 두 자녀를 가진 부인이 이사를 왔는데 “딸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대답은 “네”였다. 나머지 아이도 딸일 확률은 얼마일까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2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인구 전체를 보면 남녀의 비가 대체로 1/2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얼른 생각나는 이 대푯값을 대답으로 제시합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경우의 수에 따라 계산해보면 답은 1/3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간단한 예에서 보는 주먹구구식 판단을 전문가들은 휴리스틱이라고 부르는데, 일상생활에서 이런 주먹구구식 판단이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휴리스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휴리스틱의 일종으로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교수는 유엔에 가입한 흑인국가의 비율을 대학생들에게 묻고 나서, 답장에 학생증의 번호 뒷자리 두 숫자를 써넣으라고 했습니다. 흑인국가의 비율과 학생증 번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이 대답한 흑인국가의 비율과 학생증 번호 사이에는 높은 상관관계가 있었습니다. 학생증 번호가 흑인국가 비율의 추정에 기준점이 된 것입니다.
기준점 효과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관찰되기 때문에 이 일본교수의 연구와 비슷한 연구들이 문헌에 자주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많은 부동산투자가들이 투자를 결행할 때에는 최근의 부동산 가격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주된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고 합니다. 어느 대학교를 졸업했는가를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일종의 휴리스틱 입니다.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를 분명히 알고 있고 오직 자신의 선호에 따라 선택한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합리적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요즈음 살 빼기가 크게 유행하면서 주스의 당분함량에 많은 사람들이 신경을 쓰는데, 예를 들어서 ‘5%의 당분 포함’ 주스나 ‘95% 무가당’ 주스는 결국 당분농도가 같습니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5%의 당분 포함’주스보다는 ‘95% 무가당’ 주스를 선택합니다. 당분농도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95% 무가당’이라고 표시된 주스가 ‘5%의 당분 포함’이라고 표시된 주스를 밀어내게 됩니다. 600명의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였다고 합시다. 두 가지 치료법 중에서 하나는 200명을 살게 하고 다른 하나는 400명을 죽게 한다고 하면, 결국 효과가 같은 치료법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명 살게 하는 치료법을 선택합니다. 이와 같이 내용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선택을 뒤바뀌게 하는 효과를 프레임 효과(frame effect)라고 합니다. 이 프레임 효과 역시 일상생활에서 아주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고 있습니다.
행태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 혹은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의외로 강하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이들이 이용한 한 가지 방법은 최후통첩 게임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A에게 10만원의 돈을 주면서 B와 나누어가지라고 했다고 합시다. B에게 얼마만큼 줄 것인지는 전적으로 A가 결정합니다. 단, B가 A의 제안을 거부하면 그 10만원은 회수됩니다. 그러나 B의 입장에서 보면, A가 단돈 천원을 주더라도 받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왜냐 하면 아무 것도 받지 않는 것보다는 천원이라도 받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이 A의 입장에 있다면 B에게 얼마를 주겠습니까?
이 게임은 워낙 유명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대체로 보면, A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 제안액수는 45% 정도라고 합니다. 만일 A가 30% 이하를 제안하면, B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는 경제적 합리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행태경제학자들이 알아낸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일견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이들의 행동이 종잡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학적으로는 비합리적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어느 정도 규칙성이 있습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그런 비합리적 행동은 우리 두뇌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인식능력이나 지적 능력이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지능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되도록이면 머리를 쓰지 않고 일상사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며, 우리의 두뇌도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이 전제하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선택이나 행동이 일상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행태경제학자들의 연구는 단순히 인간의 행태에 대한 호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행태경제학의 연구결과는 보다 더 현실적인 정책을 구상하고 응용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미국의 저축률을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이 그 좋은 예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의 저축률은 거의 영에 가깝습니다. 미국의 많은 경제학들이 이 극히 낮은 저축률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행태경제학의 측면에서 보면, 미국 가계의 극히 낮은 저축률은 다음의 네 가지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사람들의 비합리성, 자제력 부족, 미루는 버릇, 손실의 혐오. 행태경제학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완화시켜줌으로써 저축률을 전반적으로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봉급이 인상될 때마다 인상분만 강제로 저축시킴으로써 손실혐오를 최소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이 저축 장려프로그램을 여러 기업에 응용해본 결과 회사원들의 저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는 연구보고가 있습니다.
행태경제학자들의 연구결과가 행복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되는 선택을 하거나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인지 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득수준이 높아지더라도 국민의 행복지수는 별로 높아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행복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행복에 관한 정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행태경제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큰 시사점을 던집니다.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시장주의(혹은 신자유주의) 진영과 반시장주의 진영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시장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되도록이면 시장을 통해서 달성하고, 우리가 당면한 사회문제는 되도록이면 시장의 원리로 풀어갈 것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시장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합니다. 많은 경우 실제로 사람들은 시장주의자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게 행동하는데 시장주의의 주문에 따라 사회문제를 풀어가야 하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많아 보입니다. 만일 행태경제학의 연구결과를 수용한다면 시장주의의 입장은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부의 역할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치달을 수는 없습니다. 기업가나 장사꾼과 마찬가지로 정부와 정치가도 국민의 이익에 앞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부단히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공공선택이론의 강력한 경고 그리고 정부 및 정치의 실패가 시장의 실패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공공선택이론가들의 증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이라는 것 그리고 정부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정부와 시장의 역할분담에 대하여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떠든다고 공공선택이론가들이 불평하는데, 어떻든 앞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그리고 행태경제학의 연구결과를 수용한다면 시장과 정부의 적절한 역할분담이 재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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